윤이 과거 로그로부터 n달 후~광복 이전 시점입니다.
1편 링크 : https://yellowbird-113.tistory.com/99
그 사이에 과거 로그의 화자였던 우자 친구에게 이름이 생겼어요. 류청현이랍니다.
부제는... ‘서 윤’으로서의 마지막 날 정도가 되겠네요.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윤이 여상한 낯으로 회의실에 들어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미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여섯의 단원이 일제히 윤을 돌아보았다. 그 가운데에 선 단장이 가라앉은 눈으로 윤을 응시했다.
“서 윤. 묻는 말에 솔직히 답하라.”
“예.”
평소와 분위기가 조금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간과하며, 윤이 단장을 바라보았다.
“네가 놈들의 밀정인가?”
“... ...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윤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웬만한 일로는 당황하지 않는 윤을 흔들 만한 질문이었다. 명백한 동요가 윤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런 표정을 한 채 윤은 단원들에게로 잠시 시선을 옮겼다. 모두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눈에 서린 것이 의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윤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근거로 그리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 쪽지에 대해 설명하도록.”
단장이 종이 한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불에 타다 만 것인지 반 정도가 그을려 있는 서신. 윤의 의문 가득한 시선이 종이로 옮겨갔다가 다시 단장에게로 향했다.
“네가 비밀리에 입수했다던, 거사 당일의 정보와 내용이 같더군.”
윤은 가만히 쪽지를 바라보았다. 중간중간 그을려서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대략적인 내용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일본어로 적힌 쪽지를 띄엄띄엄 읽어내리는 윤의 얼굴에 미약한 당혹이 떠올랐다. 윤이 단장에게 보고했던 거사 장소의 구조, 경비 인력 배치, 행사장에서 암살 목표의 자리, 도주로까지 모든 정보가 똑같이 적혀 있었기에. 그것들에 더해, 한 마디가 더 적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결사단엔 이렇게 전해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그날엔 모든 것이 달랐지. 예정에도 없던 순사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 예. 그랬지요.”
며칠 전, 경성의 어느 호텔에서 성대한 축하연이 열렸다. 총독부에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는 매국노와 일본의 고위 관료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였기에, 암살 기회를 엿보던 결사단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하여 단에서는 연회장 내부에 폭탄을 반입하고, 확실한 목표의 처단을 위해 몇 명을 차출해 호텔 내부로 잠입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 당일 호텔에 잠입했을 때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순사들을 피해 계획했던 잠입 경로에는 순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단원들은 물러날 새도 없이 그들에게 붙들리거나 사살당했다. 작전에 참여한 이들 중에 살아서 복귀한 이는 호텔 밖에서 대기하던 단원 두 명과 호텔 내부로 잠입했던 윤, 셋뿐이었다.
어떻게 순사들이 알고 대기하고 있었는지, 그저 우연히 연회 직전에 배치가 변경된 것뿐인지, 아니면 정보가 샌 것인지. 의심과 불안이 터져 왔다. 게다가 거사 며칠 전에 실종되었던 단원, 연우진이 총에 맞은 채로 발견되기까지 했다. 실패한 작전에서 순국한 게 일곱, 살해당한 게 하나. 도합 여덟 명을 잃었으니 단의 분위기는 어둡다 못해 날카로웠다. 동료를 잃은 울분에, 왜놈들을 향한 원망에 불타던 단원들은 입을 모아 밀정의 존재를 의심했다. 그 밀정이 작전을 실패하게 했으며, 자신의 정체를 들켜 한 명을 살해한 게 아니냐는 추론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이 이렇게까지 될 리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단에서는 한 명 한 명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가장 의문스러운 행적을 보였던 단원에게 화살이 꽂혔다. 서 윤. 호텔 내부에 잠입했던 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왔으며, 이번 거사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한 자. 그는 예전부터 몇 번이나 위험한 작전에서 홀로 살아남아왔고, 가져오는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는거사가 실패한 후 한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서 윤이 경성을 떠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의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절묘한 시점의 부재였다. 이는 정보를 빼돌렸던 밀정이 놈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살아나온 후, 그대로 잠적해 버렸다는 의심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작전 이후에 서 윤이 '수상한 서신'을 태우고 자리를 떴다는 증언과 물증이 합쳐지자, 단원들은 서 윤이 밀정일 것이라 거의 확신했다.
윤이 의심받을 때마다 감싸주며 화제를 돌려왔던 그의 친우는 몇 달 전에 명을 달리했기에, 윤을 두둔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모든 정황을 전해 들은 단장이 윤을 정식으로 심문하겠다 결론 내렸음에도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소중한 동료를 잃고 뼈아픈 실패를 겪은 이들에게 필요한 건 원흉의 처단이었고, 그전에는 무엇 하나 달라질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거사 이후에 대법전의 호출을 받아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지금에서야 경성으로 돌아온 윤이, 이 일련의 흐름을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본 적도 없는 서신이 증거랍시고 나온 상황이라 평소보다 동요한 모습을 보여버렸다. 본의 아니게 의심에 부채질만 한 꼴이었다. 윤은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며 단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설명해라.”
“무엇을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단장님. 저는 본 적 없는 서신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윤 동지가 그 서신을 불 속에 던져넣고 자리를 뜨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혹시나 해서 내용을 확인하고 단장님께 고한 것인데...!”
윤이 부정하자, 단장의 오른쪽에 서 있던 단원의 입에서 노기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 거사에서 윤과 함께 살아남은 남자였다. 그가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윤을 노려보았다. 노골적인 원망과 억울함을 담은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그런 적이 없는데 대체 무엇을 봤다는-”
“서 윤. 그렇다면 넌 어떻게 거사 당일의 정보를 입수했지?”
“단장님, 그건... ...”
윤은 침묵했다. 이것만은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경찰서에 직접 잠입해서 회의 내용을 엿듣고, 배치도를 직접 보고 순사들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할 수가 없었다. 마법으로 모습을 바꾸고 기척을 죽이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우자들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윤의 머릿속에 순간 경찰서 내부에 정보원을 두었다는 거짓말로 둘러댈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 이 살벌한 분위기에서는 정보원의 신상까지 털어놓으라 요구한 후, 자신을 구금해둔 채 사실 여부를 확인하러 갈 것이다. 윤이 아는 동지들은 그런 이들이었으니까.
“왜 대답이 없습니까, 윤 동지. 이전부터 다들 궁금해했습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알아오는지.”
“... 그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정말로 저 서신은 처음 보는 것입니다.”
“의심을 받는 상황인데도 말할 수 없는 겁니까? 게다가 그 방법은 단장님께서도 모르시는 것 같은데, 이게 말이 됩니까?”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꺼내자, 다른 단원들 역시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걸 본 윤은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저 서신을 받고 불태웠다는 것은 명백한 모함이었다. 다른 목격자도 없고, 서신을 보내는 이나 받는 이의 이름도 써 있지 않으니 제 것이라는 증거도 없었다. 윤이 아는 그의 동지들은 그걸 모를 이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모함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고 오롯이 윤을 의심하기만 했다. ... 대체 왜. 참담함을 삼키며 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윤은 입을 열어 해명하는 대신 마법을 사용했다. 스승님의 특기이자 제게 가장 자신 있는 힘. 평범한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물방울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주인의 의지에 따르는 각인이, 윤이 서신을 태우는 것을 봤다며 거짓을 내뱉던 남자에게로 향했다.
“... ...”
마법을 통해 진실을 확인한 윤이 고개를 들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뻔뻔하게 응수하며 윤을 마주 보았다.
“서 윤. 시간 끌지 말고 대답해라.”
“가끔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내 끝이 어떠할지에 대해서요.”
윤은 답 대신, 오래전부터 했던 생각을 꺼내놓았다. 마법사인 자신이 언제까지 결사단원 서 윤으로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만 단원으로서 활동하겠다고 스승님과 약조했기에, 단원들과의 이별은 필연이었다. 그날이 오면 동지들에게 어떻게 이별을 고할까. 나의 끝은 어떤 식일까... 그런 게 궁금했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모두 쓸모없어진 생각이지만.
윤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이 일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을 실행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짧게 각오를 다진 윤이 입을 열었다.
“... 이런 끝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윤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그건 슬퍼 보이는 웃음이기도, 죄책감이 어린 웃음으로 보이기도 했다. 거짓 하나 없는, 윤의 진심이 담긴 표정이었다. 윤의 그런 표정과 수긍인지 부정인지 모호한 말에, 단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 윤, 그럼, 정말로 네가...”
“죄송합니다, 단장님.”
윤이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 반응에 단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황과 물증이 있었기에 추궁은 했지만, 단장은 윤을 정말로 의심하진 않았었다. 여태 윤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다. 윤의 수상한 점들을 캐묻고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했을 뿐. 남에게 이유를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단장에겐 윤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말이다.
“... ... 대체, 왜.”
“글쎄요. 이유야 다양하겠지요. 처음부터 밀정 노릇을 할 요량으로 들어왔거나, 협박이나 고문 끝에 변절하거나. 혹은... ...”
서 윤이 말을 잠시 멈추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며 윤이 중얼거렸다.
“... 처음부터 각오가 부족한 자였거나.”
시선을 받은 남자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모두가 윤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그것을 눈치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개새끼가!! 그래 놓고 뻔뻔하게 여길 기어들어 와??”
누군가가 격분하여 앞으로 나섰다. 윤은 제 멱살을 잡아 오는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신감과 원망으로 얼룩진 동료의 눈빛만은 차마 마주하지 못한 채 시선을 내렸다. 윤의 멱살을 잡은 이가 그를 바닥으로 밀어 넘어트리고 거세게 짓밟고 걷어찼다. 윤은 앓는 소리 한 번을 내지 않고 묵묵히 가해지는 원망을 받아들였다. 다른 때였다면 쉽게 흥분하는 그를 말렸을 단원들은 조용히 방관하기만 했다.
“... 진정해라.”
보다 못한 단장이 분노한 단원을 말렸다. 어깨를 잡고 만류하자 단원은 분한 듯 바닥에 크게 발을 구르며 분노로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왜!! 대체 왜 말리십니까!! 제가 죽여버릴 겁니다. 저 새끼 때문에 해영이도, 현주도, 우진이도...! 모두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진정하라고 했다.”
나지막이 중얼거린 단장이, 차가워진 눈빛으로 윤을 내려다보았다. 윤은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 연우진을 죽인 것도 너인가?”
“... ... 그건.”
윤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것까지는 들킬 줄 몰랐다는 표정. 한순간 윤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진실에 단장의 얼굴이 더 굳었다. 사실이구나. 네가, 네가 그를 죽이고, 우리를 배신했다니. 어떻게 네가. 어째서 네가. 그럴 리 없다고 믿었는데. 너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널 잘못 본 건가? 단장은 밀려오는 배신감에 느리게 눈을 감으며 숨을 내쉬었다.
“연 동지에게 자기가 밀정임을 들켰기 때문에 죽인 게 틀림없습니다!”
“단장님. 더 들을 필요가 있습니까? 처단을 명해주십시오! 제 손으로 죽여버릴 겁니다!”
단장은 말없이 윤을 내려다보았다. 배신감과 허탈함으로 얼룩진 원망의 눈빛을 받은 윤이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각오했다지만 그런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윤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버렸다.
윤의 머리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몇 번이나 남에게 겨누었던 총구가 자신에게 겨눠졌다. 그럼에도 윤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잘못했다며 빌지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죽음 앞의 그는 떨지조차 않았다. 평소 그의 용의주도한 행적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틈을 내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체념하고 수용했다.
“... 단의 규율에 따라, 배신자를 처단한다.”
총성이 울렸다.
사람이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진아.”
“... 하. 여긴 어떻게 알았어?”
이른 새벽, 진은 자신의 집에 침입한 이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날’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다시 만난 적도 없고, 당연히 집도 알려준 적이 없는데. 대체 여길 어떻게 안 건지... 진은 가족이 아니라 죽여야 할 적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윤을 경계했다. 가까운 이에게 총이 겨눠진 지 몇 시진이나 지났다고, 또다시 총구가 들이밀어진 윤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윤은 동생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 채 들고 온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고 양손을 들어 보였다.
“여긴 왜 왔어. 내가 꼴도 보기 싫다고 하지 않았나? 아, 날 팔아넘기기라도 하게?”
“... 잘 지냈어? 제수씨랑 우리 조카는 건강하고?”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안부를 물어?”
“... ...”
윤은 그런 동생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화하게 웃어주었다. 진은 그런 형의 여상한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내게 있어서 죽일 놈이지만, 당신에게 있어서 나는 아직 동생인 것 같아서. ... 진은 그 사실이 못내 불쾌했다.
“제대로 대답하는 게 없군. 왜 왔는지나 말해.”
“마지막으로 줄 게 있어서.”
윤의 시선이 내려둔 가방을 향했다. 지폐 다발이 가득 담겨있을 것 같은, 꽤 큰 여행용 가방이었다. 그걸 바라본 진이 피식 웃었다.
“뇌물 바치러 온 거면 번지수가 틀렸는데. 여긴 불령선인 집이거든?”
“이제 형이 주는 건 받기 싫어?”
“그럼 좋겠냐? 더러운 돈일 텐데.”
“네가 깨끗한 곳에 써 주면 되지 않을까?”
진이 뭐라고 말해도, 윤은 그저 부드럽게 웃어줄 뿐이었다. 진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윤은 그런 동생을 한순간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는 듯 바라보기만 하다가.
“... 형 갈게. 잘 지내. 건강하고.”
손을 내리고 태연하게 뒤돌았다. 총이 겨눠진 상태였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자신을 만만하게 여겼다는 생각에 화가 난 진이 소리쳤다.
“... 누가 보내준댔어? 거기 안 서?”
“안 보내면, 죽이기라도 하려고?”
윤이 가만히 멈춰 서서, 등을 돌린 채로 답했다. 그 말에 진이 조금 멈칫거렸다. 진이 윤을 일제의 부역자라 생각하게 된 그날, 그 이후로 진은 윤을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죽일 수도 있었다. 사람을 처음 죽여보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 ... 하지만, 정말 죽일 수 있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근거리의 ‘목표’이니 어려울 것도 없고, 쉽게 죽일 수 있을 텐데. 그런데도 진은 도저히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그런 동생의 망설임을 진작 눈치채고 있던 윤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진을 돌아보며 다정하게 중얼거렸다.
“... 그러지 마, 진아.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 ...”
“형 때문에 네 손을 더럽히지는 마. 다른 이도 아니고, 혈육을 죽인 괴로움은 꽤 오래갈 테니까.”
“... 무슨 소리야.”
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멈췄던 걸음을 떼어, 뒤돌아 현관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걸 바라보는 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혈육을 죽인 괴로움이 오래 갈 거라고? ... 그걸 형이 어떻게 아는데? 죽여 보기라도 했어? 대체 누굴? 설마...
“대답해. 무슨 소리냐니까?”
윤은 여전히 침묵했다. 돌아보지도 않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진을 엄습했다. 이상할 정도로 그 뒷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어떤 예감이 들었다. 자신은 날카롭게 굴며 욕만 했는데도, 다정하게 바라보던 표정. 내려두고 간 가방. 마지막이라는 말. 마지막. 마지막...
... 이제 어디 가서 뭘 할 거길래 그렇게 말해?
“... ... 형, 대답해. 내가... 내가 묻잖아!!”
형이라는 말이 들려오자 현관문 앞에 선 윤이 고개를 돌렸다. 대답하는 대신 사랑하는 동생을 바라보며 그저 웃어주었다. 진이 자신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있어도, 그로 인해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살아 있으니까. 살아서 이렇게라도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서 윤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유산을 넘겨줄 수 있으니까 되었다. 해명을 하고 오해를 풀 생각은 없었다. 그 오해가 죽도록 억울하고 서글펐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독립운동하다가 죽은 형보다, 민족의 반역자인 형이 죽는 게 덜 슬플 테니까.
“잘 지내, 진아.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 해.”
그렇게 웃어준 윤이 밖으로 나가며 미련 없이 대문을 닫았다. 몇 초간 망설인 진이 문을 열고 따라 나갔을 때는, 윤이 연기처럼 증발해 버린 후였다.
경성의 한적한 밤거리를 거니는 남자의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모든 결과를 보고하고 그 대가로서 받은 것을 생각할 때마다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 돈이면 앞으로 걱정할 것 따윈 하나도 없을 테니까. 더는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아도 되고,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릴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히죽 웃었다. 참 좋은 시대였다. 고작 밀고 정도로 평생을 놀고먹을 돈을 손에 쥘 수 있다니! 이런 길을 두고 목숨을 거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암. 그깟 나라가 밥 먹여주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남자는 품 안에 넣어두었던 봉투를 꺼내 부적처럼 쥐었다. 흥분 어린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남자가 골목을 돌아 한참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쿠당탕, 무언가에 발이라도 걸린 것처럼 몸이 바닥에 굴렀다.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두툼한 돈봉투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남자가 어둠 속에서 넘어진 원인을 찾으며 화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사이, 발을 건 이가 봉투를 주워 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는 차가운 비웃음을 흘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동지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신한 값치고는 푼돈이군.”
“... 서, 서 윤??”
남자의 눈이 커졌다. 저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이의 이름이었다. 말도 안 돼. 분명 총에 맞아 숨이 끊어지는 것을 똑똑히 지켜봤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확인했고 시신까지 처리했는데. 절대 살아 있을 리가 없는데???
“너, 너 죽었, 잖아...??”
윤은 대답하지 않고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노려보는 윤의 모습에, 평정을 잃었던 남자의 표정에 서서히 안도가 떠올랐다.
“... ... 아. 그래. 억울하게 죽었으니 귀신이 될 만도 하지.”
남자는 픽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누명을 써서 죽은 게 퍽 억울했겠지. 단원 모두에게 의심받은 것이 무색할 정도로 네놈은 결백했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남자가 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날 노려보는 것 외에 네가 뭘 할 수 있지?”
“움직이지 마.”
윤이 총을 꺼내 남자에게 겨누자 일어나려던 남자가 반사적으로 멈칫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윤을 귀신이라 여기는지, 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발로 다시금 섰다. 남자는 바닥에 한바탕 구르느라 흙먼지가 묻은 옷을 탈탈 털고는 귀신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우습기 그지없군. 죽은 자가 산 자를 어떻게 해친단 말이야. 내가 고작 귀신 따위를 겁낼-”
탕. 예고도 없이 쏘아져 나간 총알이 남자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무릎이 꺾였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엔, 총에 맞은 곳에서부터 퍼져나간 고통이 온몸을 잠식한 후였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아아아아악!”
남자의 몸이 다시금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너무나도 아팠다.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니야. 귀신 같은 게 아니야. 총을 쏘는 귀신이 어디 있어!!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저놈이, 저승에서 살아 돌아와서, 나를, 나를 죽이려고...!
“... 흡, 흐윽.”
자신에게 죽음의 위기가 닥쳤음을 깨달은 남자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윤은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표정을 한 채로 남자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제 머리를 날려버릴 것 같은 그 모습에, 남자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살, 살려줘... ... 살려주세요, 윤 동지... 제발. 제가 잘못, 흐윽, 했습니다. 누명을 씌운 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
“그, 그렇지만!! 안 죽었잖아요...? 살, 았으면 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윽, 제, 발.”
“착각하는군. 나는 복수를 하러 온 게 아니야.”
복수가 아니면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남자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의문을 삼키며 윤을 바라보았다.
“단을 배신하고 동지들을 팔아넘긴 진짜 밀정을 처단하러 온 거다.”
“그, 그건...!”
...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남자의 표정에 일순 당황스러움이 스쳤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서글픈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간신히 바닥을 기어 서 윤의 바짓가랑이를 꾹 쥐고는 애달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전!! 저는 억울합니다...! 윤 동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고문당해 본 적 없잖습니까!! 나, 나는 그냥, 흐윽, 살고 싶어서...”
“... ...”
“나, 나도 밀정 노릇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다고요!! 죽고 싶지 않았던 게 죕니까??”
“... 뻔뻔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 이런 상황에서도 거짓을 지껄여?”
윤은 물의 각인이 알려주었던 남자의 과거를 떠올렸다. 한 달 전, 남자가 순사들에게 사로잡혀 고문실로 끌려갔던 건 맞았으나, 그는 털끝 하나 다친 적이 없었다. 형틀에 묶이기도 전에 벌벌 떨면서 묻지도 않은 것을 전부 털어놓았으니까. 살려만 주신다면 밀정 노릇을 하겠다며 무릎을 꿇고 빌었으니까. 그래 놓고 한다는 말이, 뭐? 억울하다고? 죽고 싶지 않았던 게 죄냐고? 그 뻔뻔스러운 작태에, 분노를 죽이려 했던 윤의 언성이 기어코 높아졌다.
“네놈은 죽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동지를 팔아 호의호식하고 싶었을 뿐이겠지!!”
윤에게는 고문당해 끔찍한 꼴이 되어서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던 친우가 있었다. 놈들에게 정보를 흘리느니 죽겠다며 자결한 동지들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대의를 위한다는 이유로 덧없이 사그라든 목숨들은 이제 셀 수조차 없이 많았다. 그들이라 해서 죽고 싶었을 리가 없었다. 죽어도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더러운 배신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의 목숨을 이용했다. 우리의 대의를 모욕했다. 자신의 사익을 위해 동지를 팔아넘기고, 무고한 이를 밀정으로 몰아 죽여버렸다. 그나마 모함한 대상이 자신이었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또 다른 동지가 죽었을 터였다.
윤은,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윤 동지, 제발... ...”
“그 입 닥쳐.”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애원하는 목소리가 퍽 애처로웠으나 윤의 얼굴에는 연민 한 점 깃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도 여전히 자신을 ‘동지’라 부르는 그의 뻔뻔함에 차게 분노할 뿐이었다.
“단의 규율에 따라, 배신자를 처단하겠다.”
윤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과 함께 남자의 애걸복걸하는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바닥에 쓰러져 절명한 배신자의 시체를, 윤이 분노를 담아 콱 짓밟았다.
“... ...”
이 사람 때문에 죽은 이들이 이들이 스쳐 지나갔다. 시신조차 찾지 못해 장례도 치르지 못한 동지들을 떠올렸다. 내가 밀정이 두 명이었음을 진작 알았다면 죽지 않았을 목숨들. 전부 내 무능 때문에. 전부 나 때문에... ... 괴로움에 숨이 막힌 윤이 두 눈을 꾹 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야지. 정신 차려, 서 윤. 아직 할 일 남았잖아. 시체를 처리하고, 문호 지부에 들러서 새 신분을-
“... 너.”
갑자기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윤이 움찔거리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대와 눈이 마주치자 윤이 옅게 웃었다.
“... 단장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여기 계십니까.”
윤은 그리 중얼거리며 시체에 올렸던 발을 슬그머니 내렸다. 들고 있던 총도 멀리 던져버리고 비어 있는 손을 상대에게 보였다. 당신을 해치지 않겠다고, 자신을 경계하지 말아 달라고. 윤의 행동이 그런 뜻임을 알아들은 단장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 ... 살아, 있었군.”
위험하지 않은 임무는 없다. 목숨을 걸지 않는 작전 또한 드물었다. 하지만 단장이 봐온 서 윤은, 죽음을 각오한 정도가 아니라 죽지 않는다는 듯이 굴었다. 서 윤이 종종 친우인 청현을 안심시키며 ‘자신은 죽지 않는다’라고 했다는 것을, 단장은 알고 있었다. 단장 역시 처음에는 그저 젊은 피의 객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서 윤이 거짓말을 즐기는 성정이 아님을 깨달은 후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서 윤은 죽지 않는다. 불사의 존재는 아닐지 몰라도, 그의 목숨이 하나일 리가 없다. 그게 단장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단장은 서 윤을 깊이 신뢰할 수 있었다. 저런 힘을 가진 이가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올곧게 조선을 위한다. 타인을 위해 얼마든지 사지로 뛰어든다. 정체 모를 강한 힘을 가졌으니, 더 편한 삶을 택할 수 있을 게 분명한데도 험한 길을 걷는다.
그렇기에 단장은 서 윤을 믿었다. 그가 죽지 않는다고 결론지은 후로는 그가 함께하는 작전에서 조금 마음을 놓기도 했다. 비록 어제를 기점으로 서 윤은 죽어버렸고, 그가 살아남아 왔던 것은 그저 우연이었으며 쌓았던 신뢰는 산산조각 나버렸지만... ...
... 지금, 그는 멀쩡히 살아서 단장의 눈앞에 서 있었다.
단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나씩 되짚어보자. 그가 정말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존재라면, 어제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은 이유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인가? 그 후에 자신을 죽인 자에게 복수하려고? ... 아니. 그렇다기엔 나를 죽이지 않았다. 처단 결정을 내리고 그의 숨을 끊은 것은 나인데, 내게 복수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다. 자신을 죽인 내 앞에서는 총을 버렸으면서, 다른 단원은 몰래 찾아가 죽인 후에 짓밟기까지 한다고? 원한이 있는 상대에게도 잘 하지 않는 짓을?
“... 설마.”
... 아. 돌이켜 보면, 서 윤은 자신의 입으로 밀정이라 고한 적이 없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밀정이 되는 이유는 다양하다는 말만을 했었지. ... ...어제, 서 윤이 죽기 전의 상황을 천천히 되짚은 단장이 입을 열었다.
“... ... 그렇군. 그래. 너는... 밀정이 아니었군.”
“... ...”
“그가... 네가 방금 죽인 그가 진짜 밀정인 건가?”
윤은 말없이 단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단장이 자신을 신뢰해 준다는 것을, 윤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믿어주고, 제 생존을 깨닫자마자 신뢰를 바탕으로 한 추론으로 진실에 다다를 줄은 몰랐다. 이를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윤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 ... 배신자로 결론지으시고 처단하신 이에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왜 저를 믿으십니까? 제게 미심쩍은 부분이 없었다고는 못 할 텐데요.”
악명 높은 일본 순사라 해도, 윤에게 있어서는 고작 우자일 뿐이었다. 그들의 눈을 가리고 몸을 피하는 것, 기척을 감추고 그들 사이에 숨어들어 정보를 캐내는 것, 동지들 대신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 고작 그런 것 따위가 마법사에게 어려울 리가 없었다. 서 윤은 마법을 악용하지 않는 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했다. 들켜도 문제 되지 않을 정도로. 마법사가 ‘사회적 신분’으로 원활하게 활동하기 위해서 쓰는 마법이라 둘러댈 수 있을 정도로만. 마법은 되도록 자신에게만 걸었으며 우자를 죽일 때는 결코 마법을 쓰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총독이고 천황이고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고, 그럴 수도 있었지만, 윤은 나름 대법전으로서의 행동 수칙을 지켰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상당히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서 윤은 출처를 밝히지 못하는 고급 정보들을 여러 차례 제공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죽음을 자초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죽을 게 불 보듯 뻔한 임무에서도 몇 번이나 살아 돌아오고, 빠져나올 수 없는 포위망을 수없이 뚫고 복귀했다. 여러 차례 잠입했지만 단 한 번도 신분을 들킨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단원들이 서 윤을 수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윤은 해명 대신 침묵을 택했으니까. 그런 윤을 말없이 믿어주는 것은 친우인 청현과 단장, 둘뿐이었다. 청현은 친구의 정으로 묻지 않고 그저 넘겨주었을 뿐이겠지만, 단장의 경우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단장 역시 마법사인가 싶어 각인으로 슬쩍 엿본 적도 있었으나 단장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신뢰해 주는 이유를 굳이 따져 물을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에 윤은 여태 묻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물어야 했다.
“그러는 너는, 어째서 나를 쏘지 않았지? 총은 왜 버렸나.”
“... ...”
“네가 진짜 밀정이라면, 복수해야 할 상대는 저 자가 아니라 나다. 밀정이 아니어도 나를 원망하겠지.”
“... 원망하지 않습니다. 단장님께선 해야 할 일을 하신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래. 그 말과 행동으로 증명된 것이 아닌가?”
단장은 서 윤이 그동안 보여 온 행동을 떠올렸다. 목숨을 걸고 혼자 경찰서에 잠입해서 붙들린 단원을 구해냈던 일. 동료에게 날아드는 총알을 제 몸으로 막았던 일. 순사들에게 쫓길 때, 일부러 이목을 끌어 다른 단원들이 수월히 도망칠 수 있게 도왔던 일... 비슷한 행적은 셀 수조차 없이 많았다.
단장은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람의 행동을 믿었다. 쉽게 거짓을 뱉는 입보다는 행동에서 드러나는 것이 본심에 가까웠으니까. 하여 단장은 서 윤의 행동에서 보이는 그의 마음을 믿었다. 모든 위험은 자신이 감수하겠다는 강박에 가까운 희생정신. 의사로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는 사명감. 약자를 도우려는 정의감. 그 모든 마음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이어졌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아무리 죽지 않는다 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는 해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제일 소중한 법이다. 하지만 서 윤은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내던졌다. 대의를 위해, 동지들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패로 쓸 수 있는 자의 마음을, 어찌 의심할 수 있을까.
“너는 거짓 자백을 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 목적이 진짜 밀정의 처단이라면 나를 원망할 이유가 없다. 내가 틀렸나?”
“... ... 아니요.”
단장의 답을 들은 윤이 길게 침묵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괴물을 여전히 ‘동지’로 보아주는 단장에게는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되지 않을까. ...해결 방법은 있으니까. 윤은 혹시 몰라 챙겨온 품속의 어떤 아이템을 잠시 만지작거렸다가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선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전부... 추측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나.”
“... 그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없었습니다. 이미 모든 물증이 말소된 후였기에.”
밀정들은 꽤 철저한 편이었다. 윤이 각인으로 알아낸 것은 그들이 밀정이라는 것과, 물적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증거가 없다면 밀정이라 고할 수 없다. 각인으로 알아낸 사실을 인간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윤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독단으로 밀정들을 처단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상황이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장 빠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누명을 쓴 게 저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너는 죽지 않으니까?”
“... 예.”
죽지 않는다는 말의 반 정도는 틀렸지만, 윤은 담담하게 긍정했다. 그 반응을 본 단장의 표정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 그러지 마라, 윤아.”
“... ...”
“인간이라면 생존을 위해 발악하는 게 당연한 거다. 그러니 확실한 증거 앞에서도 발뺌하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거지.”
“... 그렇다면 저는 처음부터 어딘가 비틀린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윤이 자조 어린 표정을 지었다. 부친을 비롯해 많은 이들을 살해하고, 자신의 죽음조차 장기말으로 쓰는 이를 어떻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윤의 금빛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자신은 인계에서도 여전히 방문자라는 걸 다시금 실감했기 때문에.
“윤아.”
단장이 천천히 윤에게로 다가갔다. 안타깝다는 듯한 연민의 눈동자가 지친 윤을 바라보았다.
“그리 생각하지 마라. 너를 그렇게 만든 것은 이 잔인한 시대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손을 더럽힐 일도 없었을 테지.”
“... ...”
윤의 고개가 숙여졌다. 단장의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퍽 다정한 위로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윤이 그것을 억누르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단장님. 이런 시대가 아니었다고 해서 제가 제대로 된 인간이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제가 그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윤이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삼켜내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 어차피... 내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끝이니까.
“... 그 말씀을 긍정해 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윤아.”
“죄송하지만 단장님, 이만 꿈에서 깨어나실 시간입니다.”
순식간에 단장의 시야가 천으로 가려졌다. 자신의 머리 위를 덮은 이게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그것을 치워내기도 전에 단장의 눈이 속절없이 감겼다. 마치 저항할 수 없는 잠에 빠지는 것 같은 느낌. 힘이 풀려 쓰러지는 단장의 몸을 윤이 붙들어 안았다.
“너-”
단장이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면서 윤의 팔을 꽉 붙잡았다. 마지막이라는 예감이 들어서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단장의 눈이 감기며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당연했다. 한낱 인간의 힘으로 마녀의 요의 효과를 이겨낼 수 있을 리 없으니.
“... ... 그냥, 한밤의 꿈으로 여겨주십시오. 모두.”
제 비밀도, 제가 살아있다는 것도, 진짜 밀정에 대한 것도. 전부. 알아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윤은 아픈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잠든 단장을 벽에 기대어 앉혔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 존경하고, 또 좋아했습니다.”
그게 ‘서 윤’으로서의 마지막 말이었다. 다시 볼 수는 있겠지만 그때의 윤은 전혀 다른 이름과 낯선 얼굴일 테니, 이건 윤 나름의 작별 인사였다. 상대는 듣지조차 못하는 마지막 인사. 정말 마법사답고 비극적인 끝맺음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인계에 방문한 이방인으로서의 최선이리라. 그리 생각하며 윤은, 단장을 오래도록 눈에 담고서 일어났다.
이제, 완전히 떠날 때가 되었으니까.
여기서부턴 후일담~
윤이는 로그 이후 시점, 그러니까 ‘서 윤’으로서의 신분을 버린 후, 문호 측을 통해 위조한 새 신분으로 다시 결사단에 들어갔습니다. 단장님은 그게 윤이라는걸 어렴풋이 알았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서로 티를 내지 않았을 테고, 광복을 맞은 후 윤이는 인계에서 잠적합니다.
윤이의 남동생 진이는... 윤이가 독립운동을 했었다는 진실은 끝까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신은 할 수 없었겠죠. 여담으로 윤이 진에게 건네준 가방에는 윤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의 칠 할 정도가 들어있었습니다.
윤이는 하나 남은 유일한 가족인 진의 자손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챙겨주었습니다. 진의 후손들은 한국전쟁과 군부 독재 시기 등... 많은 일을 겪으며 단명했을 것 같네요. 친일파였던 윤의 아버지보다는 독립운동가였던 윤과 진의 피를(그리고 노빠꾸 성깔을) 물려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요(제발). 그리고 그런 성정이면 멀쩡하게 장수하긴 힘들었을지도... ... 격동의 근현대사를 개꼬라보다
여담으로 단장님은 여자입니다. 성별은 딱히 생각 안 했긴 했는데, 과거로그 1편에서 윤의 스승님 목소리를 단장님 목소리로 착각하는 장면이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