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괴 이후 시점 로그입니다. 아직 스승님 잊기 전.
엽귀로의 이직을 권유받는 윤이가 보고 싶어서 간단하게 썼습니다.
첫 문장은 예전에 같세캐에게 들었던 말입니다.
영원한 나라는 없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간다. 나의 나라를 침략하고 빼앗았던 제국 역시 그러했다. 시간의 흐름 앞에 영속하는 것은 없고, 탄생과 쇠락을 반복하며 역사를 그려간다.
그렇기에 마법 세계의 절대 왕자(王者)였던 대법전의 패배 역시, 예견된 필연일까.
무너진 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뿐만이 아니었다. 이제껏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게 무너졌다. 대법전의 위신도, 권위도, 마법 세계의 질서도, 모두. 내가 알던 세상은 크게 뒤바뀌었다. 어제와 무엇 하나 같은 게 없었다.
스승님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을 틈 따윈 없었다. 소중한 이를 잃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법전의 모두가, 저마다의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 혼자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스승님이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가 아니라, 대파괴로 인해 발생한 피해의 수습이었다. ... 스승님 역시 내가 그리 하기를 바라실 터였다.
마도서대전의 전선에서 활동하는 서경으로서 수많은 금서를 회수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늘어난 서적경을 상대했다. 대파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를 불린 서적경은 이제 대법전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대법전에 적을 두었던 마법사가 학파를 배신하고 서적경이 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서적경 중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하는 일 역시 드물진 않았다.
“선생님. 왜 저와 싸우시려는 거예요. 이해가 안 돼요.”
몇 번이나, 내가 연 주권 너머에 익숙한 이가 자리했다.
“선생님도 대파괴로 소중한 분을 잃었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그래요. 그러니까 연구하려는 거예요. 누구도 죽지 않는 세상을...!”
서경과 서적경으로서 마주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야, 동기로서 충고하는데 너도 빨리 대법전에서 발 빼는 게 나아. 서경에 걸맞는 대우도 안 해주는데 뭐하러 붙어 있어? 너도 참 미련하다.”
이전에는 무슨 관계로 마주보았었는지, 구태여 생각하지 않았다.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내가 더 강했더라면 그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당신도 그렇게 후회하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이러는 거예요. 강해지기 위해서!”
... 나에 대해 아는 이들의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말보다 더 아팠다.
그렇다고 해서 총구가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어제의 동료를 베는 일은 이전부터 숱하게 해왔던 일이었으니까. 그게 제자든, 동기든, 그 누구든. 망설이지 않았다. 주권 너머의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는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철저히 쓰러트리고, 대법전의 이념 하에 인계에서 분리할 뿐이었다.
“매번 수고가 많군, 언젠가 올 봄을 기다리며.”
“...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손으로 귀문에 잡아 넘긴 배신자와 서적경이 몇이나 되는지는 세어보지 않았다. 그저 매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엽귀의 간부가 직접 한 마디 건넬 정도로 많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귀관이 그동안 봉서해서 넘긴 서적경과 배신자들의 목록을 확인했다. 아는 이들이라 해도 주저하지 않았더군.”
친분이 있는 사이면 생각보다 흔들리는 이들이 많단 말이지... 탄식하듯 중얼거리는 눈 앞의 엽귀를 보며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죽이는 것도 아니고 고작 체포가 어렵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감정이 잠시 내 얼굴을 스쳐지나갔는지, 나와 눈을 맞춘 엽귀가 가볍게 웃었다.
“귀관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학원보다는 우리 엽귀에 어울리는 인재 같은데. 어떤가?”
예상했던 제안에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게 엽귀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처음 듣는 말도 아니었다. 대법전 소속 마법사에게도, 이제는 서적경이 되어버린 마법사에게도 종종 들었던 말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죽인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내 천직은 정말 이쪽일지도 몰랐다.
“... 좋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남을 의심하는 게 싫었다. 누가 우리를 배신할지, 배신했는지, 누가 정보를 흘렸는지. 그런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동료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걸 잡아내는 순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이미 수십 년 전에 했었던 일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감정적으로 기댈 곳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귀관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환영이다."
만일 스승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는 이 제안에 응했을까. 스승님께선 어떤 조언을 해 주셨을까... ... 눈을 감고 잠시 상상해 보았으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당신의 얼굴조차 희미해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 스승님.”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돌아올 수 없는 과거를, 바라지 않는다. 그리 되뇌이며 입 밖으로 차오른 그리움을 다시 삼켜냈다.
영원한 것은 없고, 이 또한 지나갈 것이며,
언젠가 올 다음 봄에는 이 그리움조차 전부 건네주어야 할 테니.